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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I’m here.

w. 당트

 

 

“난 당신이 좋아, 그거 말고 뭐가 더 필요해?”

 

그림자가 진 험상궂은 얼굴. 짙푸른 머리카락과 야생늑대 같은 눈동자. 짜증인지 플러팅인지 알 수 없는 말투. 카사마츠는 연구실 복도를 걸으며 내려다보던 보고서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붉은 라인이 들어간 검은 훈련복은 거칠기로 유명한 토오 시리즈 소속이었다. 이름은, 카사마츠가 눈을 살짝 내려 명찰을 살펴보았다. 아오미네 다이키.

 

아, 그 유명한 신입파일럿 놈인가. 요새 ‘토오-05’가 한 번 나갔다 들어오면 반파가 되어 차라리 새로 만드는 게 낫겠다고 우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다. 임시 지부 쪽으로 괴물을 꽂아넣기도 했다는 연구팀 막내의 생생한 증언에도 그저 기행이라 여기며 꽤 웃긴 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었다.

소문엔 비아그라도 엄청 보고, 속이야 어찌됐든 외양만은 멀쩡해서 은근히 노리는 사람들도 많다는데. 대체 뭐 볼게 있다고 자신 같은 서른 먹은 아저씨가 좋다며 쫓아다니는 건지. 이것도 기행의 일부려나, 카사마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바쁜데 귀찮아지기까지 했다. 마침 본능적으로 막 제게 손을 뻗는 아오미네를 피해 뒷걸음질 쳤다가, 보고서가 고정된 플라스틱 판으로 딱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깔끔하고 익숙한 몸놀림이었다.

 

“애송이가 어딜 덤벼. 토오 훈련 대충하는 모양이네. 아님 너무 힘들어서 정신줄을 놓은건가?”

 

카사마츠의 비릿한 웃음에 아오미네가 애송이,를 되뇌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짙푸른 눈이 위험하게 가라앉았다. 무시하면 자존심에 분풀이나 좀 하고 갈 줄 알았더니 되려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카사마츠는 서둘러 노선을 바꿨다.

 

“자, 이거 먹고 포기해. 착하지?”

 

흰 가운의 주머니를 뒤져 파란 포장지의 우유사탕을 꺼내 쥐어주었다. 커다란 손바닥에 작은 사탕 하나를 올린 아오미네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사탕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움켜쥐지도, 놓지도 못하고 가만히 제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키가 크고 생긴게 험해도 애는 애였나. 카사마츠가 풋, 작게 올라오는 웃음을 참으며 넓게 벌어진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연구실로 향하려는데 아오미네가 덜컥 그 손을 잡아당겼다. 눈앞엔 아오미네의 명찰이 보였고, 코끝에는 훈련장의 인공 흙냄새가 난다. 거북한 화학재의 냄새를 견딜만 한건, 그 안에 누군가의 체취가 섞여있기 때문일까.

 

“필요한 게 뭔지 물었던거지, 포기한단 뜻은 아니었어. 각오해, 선배.”

 

간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보통은 팀장님이나, 카사마츠상이라거나. 왜 파일럿이 자신을 향해 선배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으나 썩 나쁘게 들리진 않았다. 그래도 커다란 놈 품에 안겨있으려니 창피함에 얼굴이 벌게졌다. 카사마츠가 한 번 더 아오미네의 정강이를 콱 발로 차려는 찰나, 그가 귀신같이 몸을 물렸다.

 

“애송이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줄테니까 기다리라고.”

 

아오미네는 카사마츠를 향해 손을 휘저어 인사하며 멀어져갔다. 달려가며 허리에 달린 발신기를 확인하는 걸 보니 아마 쉬는 시간을 틈타 온 듯 했다. 가뜩이나 쉬는 시간도 짧고 트레이닝장에서 연구소는 멀기도 먼데 대체 왜 여기까지 오는 건지. 카사마츠는 저도 모르게 아오미네가 사라진 복도를 보다 다시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선배, 라는 울림이 아직 귓가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카사마츠는 앞주머니에 꽂아두었던 안경을 꺼내 쓰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와 괜한 향수에 젖기엔 일이 너무 많았고, 과거를 돌아보기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

 

 

아오미네가 파일럿이 된 계기는, 별 거 없었다. 친구들과 농구하다 움직임이 좋다며 스카웃 되었다. 당연히 농구나 체육계 쪽으로 가나 싶었는데 뜬금없는 연구소행이었다. 기본적인 체력을 테스트를 하고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수군수군하더니 쫄쫄이 옷을 입히고는 이상한 로봇에 태웠다. 그리곤 3D 홀로그램 이미지를 보며 훈련을 시켰다. 처음엔 눈도 아프고, 손도 저리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는데 나중에는 앞에서 깝죽대는 저걸 못 때리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다. 아오미네는 이를 악물고 집중했고, 홀로그램에 닿는 순간 깨달았다. 이미지는 이미지일뿐, 샌드백이 아니라서 닿아봤자 어떤 쾌감도 얻을 수 없었다. 훈련이 종료되고도 결과를 기다리며 한참을 씩씩거리자 ‘그 사람’이 다가왔다. 수군대던 흰 가운 중 한명.

 

“진짜를 주면, 칠 수 있겠냐?”

 

그렇게만 물었다. 한 뼘 내지는 두 뼘이나 작은 키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옹골진 눈빛에서 전해져오는 기운은 그를 한참 커보이게 했다. 아오미네도 지지않고 사나운 기운을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엄청 위험해 보이는 엘리베이터에 넣어졌다.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아까처럼 안내 목소리가 들렸고, 그에 따라 조종석에 앉아 몸을 고정하고 손잡이를 잡았다. 어두컴컴했던 앞이 열리자 비슷한 로봇이 멀찍이 서 있었다.

 

어리둥절한 아오미네의 귓가에 공격하라는 말이 쏟아졌다. 연습용이 아닌 실제 기체는 흔들림도 심했고 목표 조준도 잘 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해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만큼 몸에 부담이 많이 가 온 근육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빨리 끝내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아 아오미네는 온 신경을 모아 상대를 공격했다. 맞은편의 흰 로봇은 이리저리 재빨랐지만 서로의 거리가 멀어서 조준이 쉬웠다. 드디어 제대로 중심부를 노리던 찰나, 순식간에 흰 로봇이 달려왔다. 놀랄 틈도 없이 냅다 몸을 던지더니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시야 가득 비치는 하늘에 아오미네는 허, 하는 한숨밖에 내쉴 수 없었다.

푸른 하늘, 흰 로봇, 아오미네와 마찬가지로 투명한 유리창 너머 아까의 그 사람이 보였다. 흰 가운을 입고 있었던. 잿빛의 푸른 눈이 장난스레 웃고 있었다. ‘뭐야, 못 치네.’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치사하다고 따지지도 못했다.

 

당연히 파일럿 선배인줄 알았다. 무작정 다시 붙을 생각으로 들어왔는데, 그 사람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직속 사수인 안경을 쓴 남자한테 물어도 그는 의뭉스럽게 웃으며 훈련을 제대로 해내면 알려준다는 말로 신경을 긁을 뿐이었다. 속이 시커먼 놈들, 아오미네는 입으로 짜증을 내뱉으면서도 땀을 뻘뻘 흘리며 할당된 팔굽혀펴기의 개수를 채웠다.

 

그런데 그를 다시 만난 건, 식당이었다. 흰쌀밥과 고기감자조림과 유채나물무침, 게장국, 계란말이, 츠케모노와 명란젓. 그 날의 메뉴를 단단히 외우고 있을 정도로 인상 깊은 재회였다. 오후 훈련스케줄을 마치고 조금 느지막이 저녁을 먹으러 가서 남은 고기감자조림을 쓸어 왔을 때. 앨리스에나 나오는 흰 토끼처럼 흰 가운을 휘날리며 달려와 식판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국물만 조금 남아있을 고기감자조림 앞에서 허망하게 한참을 서 있었다. 방금 아오미네가 건더기란 건더기는 싹싹 긁어와 먹을게 없을 터였다. 주변의 직원에게 ‘혹시 이거 더 없습니까?’ 묻는 목소리도 처량했다. 고개를 젓는 직원에 그는 눈에 띄게 축 쳐져서는 대충 반찬을 담고 텅텅 빈 테이블 아무 곳에나 앉으려 했겠지만.

 

“여기!!!!!”

 

돌아선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밥알이 팝콘처럼 입에서 튀어나가고, 식당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아오미네가 그를 불러 세웠다.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분명히 그 남자였다. 첫날 자신을 패대기친 남자. 하늘빛과 잿빛이 섞인 동그란 눈. 놀라니까 더 토끼 같다. 아오미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다. 그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다,

 

“반찬을 너무 많이 받아서...”

 

아오미네의 손이 가리키는 반찬에 덫을 바라보는 야생동물마냥 다가왔다. 망설이는 듯 하다 결국 실례하겠다는 말과 함께 그가 앉고, 아오미네는 얼른 이름표를 확인했다. [연구팀 카사마츠 유키오]. 연구팀? 파일럿이 아니라?

 

“카사마츠상, 연구팀이야?”

“그런데?”

“왜?”

 

카사마츠는 아마도 아오미네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아오미네가 구구절절 자신의 테스트를 설명했지만 그래도 별 반응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뭐 얼굴 보며 차차 알아가면 되니까. 게다가 첫날 보였던 추태를 기억 못한다니 고맙지. 그런 생각을 하며 아오미네가 음흉하게 웃으니 카사마츠가 얼굴을 구겼다.

 

“근데 너 왜 반말이냐, 나이도 입소도 내가 선배일텐데.”

“선배도 반말 해.”

 

뭐라고 또 대답을 하려기에 아오미네는 얼른 카사마츠의 식판에 고기를 올려주었다. 오오- 감탄하는 눈이 자신을 도발했던 그 날처럼 반짝거렸다. 퐁퐁 샘솟는 웃음을 참으며 아오미네는 정신이 팔린 상대의 식판에 또 하나의 고기와 감자를 올렸다. 그제야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에서 호감이 비쳤다.

 

“너 좋은 놈이구나.”

 

단순한 사람인데 그마저 귀엽다. 아오미네는 산더미로 가져온 고기의 반을 건네주고 맛있게 먹는 그를 보며 천천히 수저를 들었다. 왠지 밥을 안 먹어도 배 부른다는 표현이 뭔지 알 것 같았다.

 

 

*

 

 

연구원과 파일럿이 마주치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연구팀이 굳이 카메라가 다 설치되어있고,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생길지 모르는 훈련장까지 올 필요도 없었을 뿐더러, 파일럿이 연구팀에 갈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 사실에 인상을 구기는 아오미네에게 안경 선배가 곧 있을 지상훈련을 알려주었다. 토오05기의 첫 출전이니만큼 연구팀 막내가 기록을 하러 임시지부에 있을 거라는 사실도 함께 전해주었다. 아오미네는 당연히 머릿속으로 누군가를 떠올렸다. 카사마츠. 아오미네보다 선배라지만 자기보다 어려 보였으니 아마 연구팀 막내란 그를 칭하는 것일 터였다.

혹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신이 난 아오미네는 평소처럼 잔소리가 쏟아지기 전에 검은색 기체에 타 적을 없앴다. 출전 당일도 어쩐지 컨디션이 좋아 거의 혼자 처리를 하고 났더니 툭, 아오미네 옆으로 비슷한 디자인의 TOO-04라고 적힌 로봇이 붙어왔다.

 

-이야~ 평소에도 좀 이렇게 하지 그랬나?

“시끄러워. 아, 임시지부 저쪽 맞는 거지?”

-땅에 파묻혀있어서 잘 안 보일텐데.

 

안 그래도 실눈이면서 눈을 더 가늘게 뜬 이마요시가 대충 방향을 가리키며 물었다. 반짝, 유리구가 빛나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었다. 아오미네가 막 해치운 놈을 이미 쓰러진 괴물들 위로 던져두려할 때였다.

 

-아오미네, 너 혹시 연구팀 카사마츠 찾는기가?

“알거 없잖아.”

-걔 오늘 현장 안 나왔다, 맞선 본다고.

 

굉음이 울렸고, 아오미네는 아직 손에 쥐고 있던 괴물을 임시지부로 꽂아 넣었다.

 

-어이구야, 너,

“누가 어딜 갔다고?”

 

 

*

 

 

본업에 충실하다 말고 갑자기 괴물과 아이컨택을 해야 했던 이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임시로 지었다지만 지부가 튼튼해서, 그리고 1차로 기절한 놈이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당장 괴물이 한입에 다 삼키고 말았을 것이었다. 이후 아오미네는 잔뜩 징계를 먹고 몸을 부술 것처럼 트레이닝만 해댔다. 이러다 신입이 괜한 곳에서 죽어나갈까, 어느날 이마요시가 심부름을 시켰다. 연구소 카사마츠 팀장 앞, 들어있는 건 온천만쥬. 연구소를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당장 달려가려는 아오미네를 붙잡은 그는 일단 좀 씻고 가라는 말과 함께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너무 상처받지 말그래이.”

 

맞선은 파투났다고 들었는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고민했던 게 무색할만큼 아오미네는 꽤 많이 당황했다. 카사마츠는 아오미네를 기억하지 못했다. 이름을 말해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첫날의 훈련도, 두 번째로 만났던 식당에서의 일까지 설명했지만 그는 인상만 찌푸렸다. 마지막으로 토오05기의 파일럿이라고 했을 때야 겨우, ‘아.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라는 딱딱한 대답만 돌아왔다. 그렇게 잔뜩 상처받고 돌아온 아오미네에게 이마요시는 기다렸다는 듯 음료캔을 건넸다.

 

“카사마츠가 원래 그렇다카이.”

 

속을 읽힌 기분에 아오미네가 캔을 구기자 풀탑으로 음료가 넘쳤다. 이마요시는 자신의 지레짐작이 맞았음에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카사마츠는 원래 파일럿이었는데, 알다시피 이게 워낙 고단한 일이라. 죽기가 참 쉽다. 안 죽을 것 같은 놈들로 고르고 골라 뽑고, 그놈들 안 죽게 보호할 기체도 튼튼하고 또 튼튼하게 만들어도. 결국 그렇게 되더라. 다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카사마츠는 독한 놈이었다. 꽤 오래 버텼지.”

 

역시 파일럿이었다. 그의 활동을 보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아오미네는 조용히 물었다.

 

“얼마나?”

“7년. 그만한 악바리에 독종은 이전도 이후도 카사마츠 밖에 없다. 그래도 다들 좋아했다. 꿋꿋이 살아 돌아와주니까 죽은 동료 시체 안 치워도 되고. 스카웃 발품 덜 팔아도 되고. 인간 같지 않제? 그래도 우린 그게 제일 중요했다. 여기 있으면 죽음에 무뎌진다. 그런데 정작 카사마츠는 무뎌지지 못했던거다.”

 

왠지 목이 타는 것 같아 아오미네가 벌컥 음료수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이마요시는 아오미네가 캔을 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기한텐 모질어도 남한텐 그런 성정이 못되어서. 어제까지 같이 훈련을 하고, 같은 숙소를 쓰고, 바로 아까까지 오늘 저녁 먹고 농구나 할까 하던 이들이 죽어나가는 걸 생눈으로 지켜보는데 멀쩡할 수 있을 리가 없었지. 특히 마지막으로 카사마츠가 이끌었던 팀은, 정말로 사이가 돈독해서. 그 사이서 혼자 살아남았으니 죄책감에 거의 폐인이 되었다카이.”

 

이마요시가 빈 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땅에 부딪힌 소리가 알루미늄 캔 안에서 공허하게 울렸다. 모든 걸 잃었을 때의 카사마츠처럼.

 

“3개월인가 지나 돌아온 카사마츠는 파일럿을 그만두겠다고 했고, 내가 파일럿으로 오면서 대신 연구팀으로 옮겼다. 토오 시리즈를 라인업 시키고 자리 잡은 뒤에 괜찮나 싶어 가봤더니 카사마츠도 잘 지내고 있어 걱정은 덜했지. 기체를 직접 탄 세월도 있고 머리도 나쁜 편이 아니었으니 여러모로 적성이었고. 다만, 걔가 날 기억하지 못할 줄은 몰랐다. 알고보니 파일럿을 잊어버리기 시작한기다. 무의식적으로 ‘기억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휴가 나오면 같이 온천에 가자했던 것도 모른다하대. 대신 뭐라 불렀는지 아나?”

 

아오미네가 고개를 젓자, 이마요시는 먼 곳을 보며 말했다.

 

“토오04번.”

 

파일럿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건 일종의 방어기제겠지. 정을 붙여봤자, 또 잃을까 무섭기라도 했을까. 안타까움이 묻은 텁텁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아오미네는 몇 번이고 자신을 까먹은 사람을 머리에 떠올리며 결심했다. 기억 할 때까지 말해주자고.

파일럿 말고, 연인 아오미네 다이키로.

 

 

*

 

 

마음을 깨달은 게 빨랐던 만큼 행동도 빨랐다. 그리고 정말 질기게 따라다녔다. 매일매일. 행동 패턴을 모르니 우연을 바라며 가 볼 수 있는 모든 곳을 누볐다. 요일 별로, 시간 별로. 그리고 수요일 오후 4시의 연구동 2층 복도에서 운명처럼 만났다. 여전히 자신을 모르는 카사마츠였지만 첫눈에 반했던 청회색 눈동자에 대고, 아오미네는 그가 당황하던 말던 고백했다. ‘좋아한다’고. 무시도 당했고, 욕도 먹었고, 맞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은 사탕을 받았다. 아까워서 먹지도 못하고 아오미네는 숙소의 유리병 안에 잘 보관했다. 벌레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뚜껑도 꼭꼭 닫아두었다. 애 같은 얼굴로 자신을 애 취급하는 것마저 귀여우니, 콩깍지가 씌여도 단단히 씌였다. 아오미네는 베개에 푹 얼굴을 묻었다. 숨이 막혀도 즐겁다.

 

카사마츠는, 천천히 아오미네와의 기억을 쌓아나갔다. 볼 때마다 들이대는 사람을 잊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파일럿이나, 팀이나, 일로써 연관지은 게 아니라 단순히 아오미네 다이키로 다가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방법은 중요치 않았다. 카사마츠가 이제는 아오미네를 기억한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 무렵, 정부 고위관계자의 시설 방문에 연구소 팀장인 카사마츠까지 파일럿 아오미네의 훈련을 보게 되었다. 얼마나 기합이 들어간건지 관리부에서 훈련 강도를 잘못 설정해 잠시 기체가 위험에 처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큰 사고 없이 잘 마무리 되었고, 아오미네도 무사했다.

훌쩍 기체에서 내린 아오미네는 제 훈련을 봐주러 와 준 카사마츠가 반가워 손을 흔들었지만 그의 눈은 아오미네를 담지 않았다. 또 다시 잊어버린 것이었다. 항상 지나던 길목에도 오지 않게 되었다. 그 모든 게 신기루처럼 모래바람에 덮인 것 같았다. 아오미네 조차 깜빡 속아 원래 그와는 모르는 사이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아오미네가 다시 희망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은, 카사마츠가 주었던 머리맡의 사탕이 여전히 녹지 않은 채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 했는데 두 번은 못할까. 아오미네는 또 한 번 지부를 샅샅이 뒤집어 놓았다. 비록 토끼굴로 숨은 토끼처럼 코빼기 하나 볼 수 없었지만. 우연처럼 다다른 운명은 카사마츠를 또 식당으로 불러왔다. 그 날의 식단은 기억하지 못했다. 간만에 보는 그가 너무 반가워서, 반찬을 볼 틈이 없었다. 아마 맨밥만 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 카사마츠가 엄청 불편한 얼굴로 아오미네의 맞은편에서 반찬을 집어 수저에 올려주었다.

 

“식단 관리 안 하냐.”

 

어색한 퉁명스러움. 익숙한 그리움. 묘하게 자신을 엇나가는 시선. 혹시, 아오미네는 밥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선배.”

“왜.”

“다, 기억하고 있지? 나 누군지 알지?”

“토오 파일,”

 

아오미네는 카사마츠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밥냄새. 그리고 단냄새. 선배 냄새.

 

“아오미네! 이 애송이가 진짜,”

“다행이다.”

 

카사마츠는 막 때리려 치켜들었던 수저를 멈췄다. 아오미네가 너무 세게 껴안아 갈비뼈가 부러지고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그보다 옅게 느껴지는 떨림을 도저히 밀어낼 수 없었다. 더 이상은, 모르는 척 하기가 힘이 들었다.

 

“나는 강하니까 괜찮아. 선배가 있는 한 절대로 죽지 않아.”

 

다짐처럼 건네는 말에, 카사마츠는 수저를 떨어뜨렸다. 빈손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아오미네의 짧은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었다. 거칠지만 분명히 다정한 손길. 걱정이 묻어나는 마음.

 

“안 죽는다고 하지 말고, 산다고 말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살아낼게.”

“오냐.”

“뽀뽀 해도 돼, 유키?”

“죽는다.”

 

그리고 누가 유키야? 따지면서도 카사마츠는 아오미네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두어번 입을 맞춘 뒤, 멀찍이서 구경하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쳐서야 카사마츠는 식당인 걸 깨닫고 창피함에 얼굴을 토마토처럼 붉혔다. 아오미네는 도망가려는 그를 곱게 놔주지 않았다. 꼭 끌어안자 제 턱에 와닿는 까만 정수리마저 귀엽다, 이 사람 진짜 너무 귀엽다.

 

 

*

 

 

날씨가 화창했다. 햇볕이 어찌나 쨍쨍했는지 겨울인지 여름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연구실 벽에 걸린 달력은 착실히 12월에 고정되어 있었고, 오늘은 아오미네가 빨간 색연필로 크게 표시한 25일의 일주일 전인, 18일이었다. 기념일이랑은 담 쌓을 것처럼 생겨선 크리스마스라고 들뜬 게 역시 애송이였다. 비웃음인지, 흐뭇함인지 경계가 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카사마츠가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급하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카사마츠의 연구실을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는 사람은 뻔했다. 양반은 못 되네. 저녁 식사 약속을 잡아놓고도 뭐가 그렇게 보고 싶은지. 아오미네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파일럿 호출기가 시끄럽게 울렸다. 단번에 인상을 팍 찌푸린 아오미네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놀지도 못하고 바로 가야겠네.”

 

카사마츠의 이마에 입을 맞춘 그가 송곳니를 보이며 웃었다.

 

“얼른 갔다 올게.”

 

카사마츠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아오미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고 다시 모니터를 보던 순간이었다. 나가다말고 그가 불렀다.

 

“유키! 갔다 오면 줄 거 있으니까 나 올 때까지 일 끝내놔, 오늘은 야근 절대 안돼.”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나 반지 안 낀다.”

“...왜.”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아오미네가 의욕을 잃었다. 한 달 전부터 카사마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더니, 몇 주 전 들떠서는 크리스마스 챙길 때 알아봤다. 저 성질머리 급한 녀석이 일주일을 참지 못하고 달려드는 게 훤히 보여 웃길 지경이었다. 그렇게 생각만 했는 줄 알았는데 카사마츠가 실제로 웃고 있었나 보았다. 아오미네가 씩씩 거리며 따져 묻는 목소리가 험했다.

 

“일할 때 불편해서. 꼈다 뺐다 불편해 결국은 빼둘텐데 어차피 둬봤자 안 쓰니까. 우리 그냥 맛있는 밥이나 먹자. 호출 울린다, 얼른 가봐.”

 

카사마츠가 다가가 입을 맞추고 엉덩이를 토닥이자 겨우 갈 마음이 생겼는지 아오미네가 발을 떼었다. 다녀오라는 말을 건넨 뒤, 다시 자리로 돌아온 카사마츠는 오늘 날짜로 예약해둔 랍스터 레스토랑을 확인하고 그 밑에 깔려있었던 페이지를 보며 옅게 웃었다.

 

 

*

 

 

이상했다. 여러모로 이상한 날이었다. 그 화창하던 날씨는 순식간에 어두침침해졌고, 평소 아오미네가 갈 것도 없이 처리할 만한 크기의 괴물은 토오 시리즈 전체가 출격했는데도 벅찼다. 되려 하나, 둘 무너지기 시작하는 건 이쪽이었다. 얼른 끝내고 돌아갈 생각은 이미 멀찌감치 던졌다. 무사히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며 아오미네도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결국, 쇼크에 정신을 잃은 토오 동료들을 지킬 건 아오미네 뿐이었다.

적당히 틈을 타 기체에서 파일럿이 있는 부분만 뜯어내 지부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쓸모없어진 기체가 셋, 아오미네가 하나. 그리고 아오미네를 지키다 괴물 가까이 끌려간 이마요시의 04기가 하나. 이쯤 되면 발을 물리거나 아니면 정면돌파였다. 발을 물리면 이마요시를 포기하는 거고 정면돌파는 아오미네가 위험해 질 수 있어도 이마요시를 구할 수 있었다. 아오미네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했다.

 

“둘 다 살아 돌아올게.”

 

사령부의 말을 무시하며 아오미네는 우선 토오04기의 다리를 잡아 끌었다. 기체에 붙은 괴물이 덩달아 따라왔다. 카메라로 확대한 이마요시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기절한 상태지만 아마 기체 내의 산소가 부족할 거라는 말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 할 수 없었다. 빨리 해결해야 한다. 아오미네는 숨을 가라앉히고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카사마츠가 그랬던 것처럼. 발로 이마요시를 밀어내고 괴물을 잡은 채 넘어뜨리려 한 순간이었다. 엄청난 충격이 가해지더니 전원이 나가버렸다. 바로 비상전원을 켰지만 지직거리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비상탈출을 누르고 막 빠져나가려는 때, 땅이 울리는 소리와 또 한 번의 거친 충격 이후 아오미네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눈을 떴을 땐, 사흘이 지나있었다.

머리는 멍했고, 몸은 좀 삐그덕 거리긴 해도 오래 자서 근육이 굳은 것 뿐이었다. 눈을 꿈뻑이는 아오미네를 붙잡고 대기하던 의료진이 간단한 검사를 마쳤을 땐, 3시간이 지나있었다. 온통 흰 병실이 답답해 블라인드를 걷자 잿빛이 섞인 하늘 틈으로 빛이 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오미네는 환자복을 입은 채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막 들어오려던 이마요시에게 바로 잡히긴 했지만.

 

“괜찮나?”

“어떻게 된거야? 나 기절했었는데.”

“...작전은 잘 끝났다.”

“다행이네. 토오말고 다른 파일럿이 또 있었나봐? 뭐, 어찌됐든 난 잠깐 누구 좀 만나고 올, 테니까...”

 

아오미네는 순간 제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이마요시를 바라보았다. 토오 말고 다른 파일럿, 있을 수야 있다. 하지만 현장에 나가는 건 토오 위주였고 급박한 상황에 출전할 수 있는 파일럿이라고 해봐야...

 

유키에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오미네의 물음에 이마요시는 입을 꾹 다물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그 시간을 달려 카사마츠에게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직접 두 눈으로 그가 이번 작전과 아무 상관없다는 걸 보면 될 테니까. 그럼 안심 할 수 있다.

 

진통제가 다 했는지 가는 도중에 갈비뼈가 아파왔다. 다리도 절었다. 그래도 가야했다. 무사하다는 걸 봐야했다. 이번 작전을 보고 충격을 먹어 또 아오미네를 잊었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냥 무사하기만 해줘. 연구소에 박혀 일만 했다고 해줘. 그렇게 빌며 열어젖힌 연구소에, 카사마츠는 없었다. 대신 눈가가 발갛게 부은 연구원 하나가 아오미네를 보고 놀랐다. 카사마츠와 아오미네의 닭살에 항상 눈길을 피하고 죄송하다며 도망가던 사람이라 눈에 익었다.

 

“유키... 카사마츠 팀장님은 어디 있습니까.”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 다들 대답을 안 하는 거야. 초조함에 아오미네는 연구원의 어깨를 부서뜨릴 것처럼 쥐고 외쳤다.

 

“어디 있냐고 묻잖아!”

 

연구원은 바들바들 떨면서 컴퓨터를 가리켰다. 카사마츠가 쓰던 컴퓨터였다. 아오미네가 그 앞으로 가자, 눈가를 비빈 연구원이 카사마츠의 컴퓨터를 켜고 usb를 꽂았다.

 

“거기, 동영상... ”

 

아오미네가 급히 파일 속 동영상을 열었다. 화면 속에는 카사마츠가 있었다. 파일럿, 카사마츠. 예전 영상인가 싶었지만 화면 구석에 표시된 시간은 바로 사흘 전 이었다. 아오미네가 출전했을 때의 시각.

영상은 몇 개가 더 있었다. 여러 개를 동시에 작은 창으로 만들어 띄우자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카사마츠가 타고 있던 기체를 찍은 영상들이었다.

 

아오미네와의 수신이 끊어지고 3분 후, 눈에 익은 흰 기체가 다가왔다. 이마요시를 제대로 수습하고 아오미네와 괴물의 경계를 떼어놓으려 애썼지만 어떤 방법도 먹히지 않았다. 사령부에선 이미 아오미네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니 어쩔 수 없다며 돌아오라는 냉정한 판단이 쏟아졌다. 그에 카사마츠가 외쳤다. 방법이 있다고. 그때는 차마 무서워서 누르지 못했던 버튼이었다. 사용법을 알면서도 카사마츠는 그것을 벼랑 끝 절망이라 여기며 무시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게 희망이었다. 카사마츠는 아오미네가 했던 것처럼 괴물을 향해 몸을 던졌다. 카사마츠가 비집고 들어간 덕에 아오미네가 괴물과 반쯤 떨어졌을 때 발로 차 멀찍이 날려 보내고 버튼을 눌렀다. 명령을 취소하기까지의 10초.

 

카사마츠는 작전실과의 연결선을 끄고, 이중녹음 시스템을 켰다.

 

-애송이, 밥 잘 먹고. 울지말고. 잔인 한 거 알지만, 약속 지켜라.

 

그게 다였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바라지도 않았건만 이름 한 번 불러주지 않고 간 것도 진짜 그 사람다웠다. 아오미네는 더 이상 모니터를 볼 수 없었다. 그저 울음이 되지 못하는 비명만 속으로 삼켜내었다. 약속을 하는 게 아니었다. 아니면 다르게 약속할 걸 그랬다. 무슨 일이 있어도,가 아니라. 당신이 있는 한, 살아낼게. 라고 했어야 했다. 당신이 없는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오미네의 앞에 남은 건 죽지 못해 사는 지옥일 뿐이었다.

 

 

아오미네는 그 날 이후 얼마간을 우유사탕이 든 유리병만 안고 있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시간만 보냈다. 그 긴 시간을 그리워하다 이제와 보니 같이 사진 한 장 찍어둔 게 없었다. 같이 했던 것보다 못 한 게 너무 많았다. 그저 얼굴만 보면 좋아서 생각도 못했다. 바보였다. 멍청이였다. 그래도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딱 하나 남아있었다.

후회는 몰아서 털어버리고 아오미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훈련을 재개했다.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살았다. 살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1년이 지나 또 다시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었다. 아오미네는 작전이 비어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머리 맡에는 여전히 우유사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에 문득 카사마츠가 보고 싶어져, 오늘도 카사마츠 묘에 놀러나 갈까 아오미네가 옷을 챙겨입을 때 택배가 왔다. 주문자는 지부 연구소였다. 받는 사람은, 아오미네의 주소. 지부 연구소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 밖에 없었다. 싸인을 하고 박스를 든 아오미네는 옷을 여미며 익숙한 길을 걸었다.

 

“나 왔어, 유키. 이거 선배가 보낸거야?”

 

아오미네는 카사마츠의 비석 곁에 앉았다. 얼마나 자주 왔는지 이미 그 자리는 맨들맨들해져 풀이 자라지 않았다. 아오미네는 나 이거 연다? 장난을 치며 박스를 봉한 테이프를 뜯었다. 작은 상자 가득 완충재 밖에 없었다. 대체 뭘 보낸거야, 중얼거리며 뒤적이는데 손끝에 딱딱한 무언가가 걸렸다. 작은 벨벳상자였다. 아오미네는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푸른 보석이 박힌 사이즈 다른 은반지가 한 쌍. 큰 반지 쪽엔 yukio, 작은 반지 쪽엔 daiki 라고 새겨져 있었다. 아오미네는 말을 잃었다. 추워서가 아니라, 입이 얼어서가 아니라. 그리워서. 너무 화가 나서.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청승맞게 반지 이거 내가 두개 다 껴야 되잖아! 거기다 사이즈 작아서 들어가지도 않아! ...선배 이런 거 귀찮다고 했으면서. 나 그래서 반지 맞춘 거 환불하고 그 돈으로 고기 썰러 가자 그러려고, 그랬는데! 하여튼 끝까지... 끝까지 당신, 진짜... 내 스타일이야... 당신 같은 사람 이제 어디서 또 만나? 어? 어디가야 볼 수 있어? 기다릴까? 여기서 일단 살면서 한 30년만 기다린다. 그러니까 고양이든 개든 잡초떼기든 다시 돌아와. 나 여기 있을 테니까. 기억 같은 거 못해도 되니까, 내가 알아볼 테니까 돌아오기만 해...”

 

마디에 걸려 우스꽝스러운 손을 하늘로 들어 보이는 아오미네의 뒤로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하,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아오미네는 환하게 웃었다.

 

유키, 메리크리스마스. 그리고.

 

안녕,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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